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치바 슈사쿠 (문단 편집) == 마츠도 이주 == 슈사쿠가 15세 되던 해, 아버지 츄자에몬은 이름을 우라야마 토시사다(浦山寿貞)로 개명하고, 시모우사노쿠니 마츠도(下総国松戸 / 現 [[치바]]현 마츠도시)로 이주한다. 마츠도에는 사토 코운과 교류가 있던 [[하타모토]] 키타무라 이와미노카미 마사히데(喜多村石見守正秀)의 도움을 받아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츠도 이주 후 츄자에몬은 마의(馬醫)로 개업하고 동시에 북진몽상류를 가르치며 가계를 꾸려나갔다. 당시 마츠도에서는 [[나카니시파일도류]](中西派一刀流)[* [[오노파 일도류]] 4대 종가 오노 지로우에몬 타다카즈(小野次郎右衛門忠一)의 제자 나카니시 츄타 타네사다(中西忠太子定)가 에도에 일도류 나카니시도장(一刀流 中西道場)을 연 것을 시초로 하는 일도류 계파. 단, 쇼와 시대까지도 해당 유파에서는 스스로 '오노파 일도류' 또는 '오노파 일도류 나카니시파'라고 불렀다. 나카니시파 일도류는 그 후에 붙여진 이름이며, 이 역시 정확하게는 해당 유파에서 '일도류 나카니시파'로 칭하고 있다. 후쿠로시나이(袋竹刀)가 아닌 현재 사용되는 죽도는 이 나카니시파 일도류 3대 종가 나카니시 츠구히로가 개발한 것이다.] 검사인 아사리 마타시치로 요시노부(浅利又七郎義信)의 도장이 유명하였다. 아사리 요시노부는 본래 마츠도에서 조개잡이를 하던 빈농이었으나, 나카니시파 3대 종가 나카니시 츄타 츠구히로(中西忠太子啓)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어 유명해진 인물로, 성인 아사리는 일본어로 바지락(浅蜊 / 아사리)을 음차한 것이다. 츄자에몬은 이 아사리 도장에 슈사쿠를 입문시킨다. 아사리 도장에서 슈사쿠가 재능을 발휘하자, 아사리 요시노부는 슈사쿠를 양자로 삼고 도장을 잇도록 하기 위해서 나카니시파 4대 종가 나카나시 츄베에 츠구마사(中西忠兵衛子正)에게 수행을 보낸다. 이 당시 나카니시파 일도류는 호구와 죽도를 사용한 훈련방식을 도입하여 에도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슈사쿠는 나카니시파 종가에서 나카니시 츠구마사, 테라다 고로우에몬 무네아리(寺田五郎右衛門宗有), 타카야나기 마타시로 요시마사(高柳又四郎義正) 등의 지도를 받으며 실력을 쌓았다. 특히 상대와 죽도를 부딪히지 않고 이긴다하여 '소리 없는 검(音無しの剣)'이라 불린 타카야나기 마타시로와의 승부에서 무승부를 거두었는데, 이때 슈사쿠가 타돌(打突)하며 딛은 발에 마룻바닥이 깨지자, 나카니시 츠구마사는 이 마룻바닥 조각을 벽에 걸고 문하생들에게 본보기로 삼았다고 한다. 이렇게 3년간 수행 후 23세 때 나카니시파의 [[면허개전]]을 받고, 무사 수행을 떠났다. 그리고 무사 수행을 마친 뒤, 요시노부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아사리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후 아사리 요시노부를 대신하여 오바마(小浜) 번주의 검술사범역을 하게 된다. 그러나 나카니시파에서의 수행을 통해 새로운 기풍에 눈을 떠서, 시대에 뒤쳐진 교수법과 불분명한 이론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웠고, 특히 쿠미타치(組太刀)의 개혁을 두고 양부 아사리 요시노부와 대립하게 된다. 신분이 낮은 자신을 발탁해준 나카니시파의 은혜 때문에 새로운 기법을 만들 수 없다는 아사리 요시노부의 방침에 슈사쿠가 반발, '문파를 버리는 것은 양부(養父)를 배신하는 것이지만, 검을 버리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결국 파양(罷養)하여 아내를 데리고 독립한다. 가전 무술인 북진류(北辰流)[* 오슈 치바씨(奥州千葉氏)의 시조인 치바 치바노스케 츠네타네(千葉千葉介常胤)의 가전 무술로 치바씨에 대대로 전해졌다고 한다.]와 북진몽상류, 나카니시파 일도류를 통합하여 북진일도류를 창시한 슈사쿠는 유파 개창을 알리고 이름을 떨치기 위해 코즈케, 무사시, 시나노 지방[* 上野([[군마현]]), 武蔵([[도쿄도]], [[사이타마현]]과 [[가나가와현]] 동부), 信濃([[나가노현]])]으로 무사수행을 떠난다. 이때 같은 일도류 계열의 유파인 [[갑원일도류]](甲源一刀流)[* 단 오노파일도류 계열이 아닌 [[이토파일도류]](伊藤派一刀流) 계열로, 헨미가(逸見家) 25대 당주 헨미 타시로겐 요시토시(逸見太四郎源義年)가 [[미조구치파일도류]](溝口派一刀流)를 배운 후, 스스로의 깨달음과 합쳐 개창한 유파. 헨미가가 본디 [[카이]] [[미나모토|겐지]](甲斐源氏) 일파인 것에서 따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의 검객과 겨뤄 이기기도 했으며, 신사에 봉납 액자를 걸어 유파를 알리려 했으나 현지의 [[마니와넨류]](馬庭念流)[* 히구치가(樋口家) 17대 당주 히구치 마타시치로겐 사다츠구(樋口又七郎源定次)를 개조로 하는 넨류(念流)의 계파. 히구치 사다츠구가 코즈케 마니와촌(現 군마현 타카사키시 요시이마치)에 도장을 연 것에서 따와 마니와넨류라고 한다. 단, 이는 외부에서 부르는 이름이며, 히구치 사다츠구가 받은 인가장은 넨류 종가 8세 인가장이기때문에, 유파 내부에서는 그냥 '넨류'라고 칭한다.]의 검객들이 저지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험악해져 코즈케 지방에서 철수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일명 이카호신사 게액 사건(伊香保神社掲額事件)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슈사쿠가 무사 수행 중 마니와 넨류 검객 고이즈미 야베에(小泉弥兵衛)를 패퇴시키자, 고이즈미를 포함해 마니와 넨류 문하생 약 100여명이 슈사쿠 문하로 입문하며 이카호 신사에 북진일도류 봉납 액자를 걸고자한다는 소문이 마니와 넨류에 전해졌다. 이를 저지하고자 마니와 넨류 문하생 약 500여명이 모여들자, 당대 종가인 17대 히구치 사다테루(樋口定輝)가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군중들이 오히려 종가가 직접 슈사쿠와 담판을 지으려고 나서는 것으로 오해하여 소동이 더욱 커졌다. 결국 지역 유지들의 중개로 슈사쿠가 코즈케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사태를 종결한다. 이후 마니와 넨류 검객으로서 이름 높던 고이즈미 야베에의 패퇴와 입문, 마니와 넨류 문하생 500여명과 대치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은 점 등이 평가되어 슈사쿠의 명성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슈사쿠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